내 인생작 중 하나인 '메멘토'.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의 충격과 놀라움은 여전히 내 기억 속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습니다. 영화가 다른 매체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간절하면 길이 보인다
흡입력 있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 가이 피어스가 분한 레너드는 자신의 아내가 살해된 시점에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됩니다. 그는 10분 이상의 기억은 만들 수 없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계속해서 리셋되는 10분짜리 게임에 불가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한 여정을 계속합니다. 10분 후면 사라질 기억을 잡기 위해 그가 찾은 단서들을 폴라로이드 사진과 직접 새긴 문신들로 남깁니다. 10분이 지나고 다시 기억이 리셋되면 그는 빠르게 몸의 문신들과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다음 행동을 결정합니다. 아내의 복수를 위한 그의 여정에 단기기억상실증은 그저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합니다.
영화는 그가 깨어나고 자신의 몸에 새겨진 문신과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가지고 추리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누구도 기억할 수 없기에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존 G를 찾아라' 라는 그의 메모.
"당신을 돕겠다" 는 테디라는 남자의 전화.
그의 문신엔 그를 믿지말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테디는 레너드가 존 G를 찾는 것을 돕는 듯합니다. 하지만 사실 테디는 부패한 경찰로 레너드의 복수심과 단기기억상실증을 이용해 자신의 적들을 대신 죽이게 합니다. 레너드는 계속해서 여러 명의 존 G를 죽여나갔던 겁니다.
후에 테디는 레너드가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비밀을 알려줍니다. 사실 존 G는 없고, 아내를 죽인 것은 레너드 자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레너드는 심정은 어땠을까요? 자신이 온몸을 문신으로 도배하고 얼마되지 않는 기억을 붙잡아가며 버틴 것은 복수를 해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레너드의 삶을 지탱하던 것이 사실은 허상이었던 겁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다음 존 G로 테디를 지목할 단서를 그의 몸에 세깁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삶이 리셋됩니다.
그것으로 그는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복수를 위해 살려둔 목숨이었는데 이제는 살기위해 복수를 하는 아이러니가 펼쳐집니다.
비선형식 구성 - 왜 이러는 건데?
역순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구성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독특합니다. 지금 봐도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구성입니다. 레너드가 잠에서 깹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온몸엔 문신이 있고, 그 문신들은 수많은 메모들로 가득합니다. 관객과 주인공은 같은 입장입니다.
왜 이런 건데? 왜 레너드가 저러는 건데?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해서 던질 수 밖에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관객은 주인공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너무나도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 영화는 흑백과 컬러를 과감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컬러 부분은 레너드가 존 G를 찾아 나서며 사람들을 만나고, 위험에 빠지는 등의 장면을 역순으로 보여줍니다.
반면 흑백 장면의 활용은 조금 다릅니다. 흑백 장면은 기억에 관한 신뢰성, 그의 죄책감으로부터의 도망과 같은 것을 상징하는 장치로서 사용됩니다. 영화 초반 그는 단기 기억 상실증으로 인해 아내를 죽게 만든 새미 잰킨스라는 인물에 관해 이야기하며 자신에게 단기 기억상실증은 그저 장애물에 불과하며 문신과 폴라로이드 등으로 극복해 가고 있다는 자기변명을 합니다. 나중에 밝혀진 건 새미 젠킨스는 레너드 자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흑백은 레너드가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천재다.
다시 한번 그의 천재성이 빛을 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만해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영화를 예술로 생각하는 프랑스 영화가 최고라 생각하는 예술영화파와 영화는 유희다, 재밌으면 그만이라는 할리우드 영화파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저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둘 다를 충족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재밌으면서도 충분히 예술적인 영화가 바로 '메멘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