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상상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유전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어가는 주미체코이민자 셀마의 인생은 온통 불행으로 가득합니다. 자신의 아들 진도 또한 유전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어갑니다. 셀마는 진도의 병을 낫게 해 주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된 일에 힘이 들기는 하지만 그녀에겐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고된 일상 속에서도 리듬과 음률을 상상합니다. 그녀는 이따금씩 상상 속 뮤지컬을 끄집어내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녀는 뮤지컬 공연 연습에도 참여하고, 자신을 좋아해 주는 호감의 남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진도의 수술을 위한 돈도 거의 모은 상태입니다. 점점 그녀의 세상이 밝은 쪽으로 향하는 듯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집주인 빌이 셀마의 돈을 훔치려 합니다. 총으로 위협하지만 맞서 싸우던 셀마가 빌을 죽이게 됩니다. 이로 인해 감옥에 가게 된 셀마는 자신이 모은 돈을 아들에게 남기고 사형당하게 됩니다. 그녀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순간에도 노래와 춤을 상상합니다. 사형장 가는 길에 있는 죄수들과 교도관들도 그녀와 함께 호흡을 맞춰 춤을 춥니다. 그녀의 목에 줄이 걸리고 집행이 임박한 순간에 그녀는 또다시 노래를 부릅니다. 그녀는 포박되어 있어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단지 구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주변의 누구도 그녀와 함께 노래를 해주거나 춤을 추지 않습니다. 아마도 셀마의 이 노래는 상상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더 슬펐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노래를 다 끝내지 못한 채 사형당하고 맙니다.
뮤지컬은 현실이 아니다.
저에게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무대 위에서나 행해지는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씩 뮤지컬을 영화화 해서 나온 작품들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몰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달랐습니다. 슬픈 영화를 봐도 웬만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던 제가 이 뮤지컬 영화를 보고는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마지막 감옥 안에서의 그녀의 노래는 너무나도 구슬프게 들렸던 기억이 납니다.
이 영화는 거친 카메라 워크가 사용되었습니다. 주로 핸드핼드와 줌인, 줌아웃을 과감하게 사용하였습니다. 편집과정에서도 콘트라스트를 오히려 줄인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런 카메라 워크와 편집은 다큐멘터리처럼 어떤 현상을 담을 때 이야기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카메라가 느껴지기 때문에 오히려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듯한 착각이 드는 것입니다. 뮤지컬과는 확실히 반대되는 속성의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관객들은 뮤지컬영화에서 갖기 힘든 주인공과의 동일시를 겪게 됩니다.
비요크라는 아티스트의 재발견
12세의 어린 나이에 첫 앨범을 낸 천재 음악가입니다. 아이슬란드 출신으로 그녀의 음악세계는 매우 독특해서 웬만해선 소화하기 힘든 인물입니다. 사실 내가 비요크를 이 영화 이전에 알았더라면 이 영화를 영영 볼 생각을 안 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 출연할 당시 그녀는 연기 경력이라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어째서 라스 폰 트리에가 이 배우를 선택했는지 의문이긴 합니다. 왜냐면 그녀의 음악 커리어만을 놓고 봤을 때 그녀는 그냥 미친 인간인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통해 그 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음에도 그녀를 연기자로 기억하기보다는 괴상한 음악가 혹은 워스트 드레서(이건 비요크로 이미지 검색만 해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욱 많다고 합니다. 영화를 찍으면서도 폰 트리에 감독과 스텝들을 많이 괴롭힌 듯합니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거나 하는 등의 기행도 벌이고 감독과 싸우기도 많이 했다는 후문입니다. 비요크는 영화제 수상소감으로 음악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지만 영화를 위해서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더 이상의 연기 생활은 중단하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보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천재는 천재인가 봅니다. 이렇게까지 이미지 변신을 시킬 수 있었다니 말입니다.
비요크의 실체를 모르고 보면 눈이 팅팅 붓도록 꺽꺽 울어 재낄 수 있는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입니다.